부부

황성희

 

낱말을 설명해 맞추는 TV 노인 프로그램에서

천생연분을 설명해야 하는 할아버지

여보 우리 같은 사이를 뭐라고 하지?’

'웬수

당황한 할아버지 손가락 넷을 펴보이며

아니네 글자

평생웬수

 

어머니의 눈망울 속 가랑잎이 떨어져 내린다

충돌과 충돌의 포연 속에서

본능과 본능의 골짜구니 사이에서

힘겹게 꾸려온 나날의 시간들이

36. 5℃ 말의 체온 속에서

 

사무치게 그리운

평생의 웬수

 

 

 

 

 

 

남편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 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기왓장 내외

윤동주

 

비오는 날 저녁에 기왓장 내외

잃어버린 외아들 생각나선지

꼬부라진 잔등을 어루만지며

쭈룩쭈룩 구슬피 울음 웁니다.

 

대궐 지붕 위에서 기왓장 내외

아름답던 옛날이 그리워선지

주름 잡힌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끄러미 하늘만 쳐다봅니다.

 

 

사랑

장세정

 

밀린 월급 때문에

우리 아버지

술 한 잔 한 날.

 

어머니는

"뭔 돈으로 마셨노?"

핀잔을 줍니다.

 

큰 대자로 누운 아버지

양말 벗기고

바지 벗기고

 

"원수다 원수하면서

꿀물 타 주고

눈곱 떼 주고

 

아버지 발 주무르다

앉아서 조는

우리 어머니

 

원수를 사랑하십니다.

 

 

 

 

 

 

 

부부의 노래

정연복

 

 

나는 너의 반달 되고

너는 나의 반달 되어

우리는 하나의

동그란 보름달이 되자

 

 

혼자서는

외롭고 모자라지만

둘이 합하여

서로의 부족한 것 채워

밤하늘에 환히 웃음 짓는

보름달 되자

 

 

너와 나의 목숨

하현달 지나 그믐달로 야위고

마침내 그 목숨

스러지는 그 날까지

초승달에서 상현달로 부풀던

우리의 사랑 잠시도 잊지 말자

 

 

나는 너의

너는 나의

소중한 반쪽

영원히 같이하는 반쪽이 되자.

 

 

 

 


연리지

정연복

 

서로 다른 둘인 것이

하나 되었네

 

 

제각기 홀로는 외로워

둘이 하나 되었네

 

 

영원히 헤어지지 말자고

서로 꼭 껴안고

햇살 같이 받고

찬이슬도 더불어 맞으며

 

한 하늘 우러러

함께 오순도순 살아가네

 

 

보는 이들의 마음

찡하게 하는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사랑이네

 

 

온몸 온 마음 모아

둘이 하나 된 애틋한 사랑

 

지상에서 꽃 피운

천상의 사랑이라네

 

 

 

 

 

 

 

 

행복한 부부

 

 

정연복 

 

 

아내와 손잡고 길을 걸으며

먼길도 가깝게 느껴진다면

 

 

아내와 마주앉아 밥을 먹으며

밥맛이 꿀맛이라면

 

 

아내와 차 한잔을 마시며

도란도란 대화 꽃이 핀다면

 

 

아내의 맘속 기쁨과 슬픔을

어느 정도는 감지할 수 있다면

 

 

아내와 나란히 잠자리에 누워

하루의 고단함이 잊혀진다면

 

 

아내와 함께 나이 들어가면서

즐거운 추억이 하나 둘 쌓인다면

 

 

아내의 늙어 가는 모습도

변함없이 예쁘게 느껴진다면

 

 

두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부부다. 

 

 

어른이 되면

 

  서정홍 

 

 

"여보, 여기 앉아 보세요.

발톱 깎아 드릴 테니."

 

 

"아니, 만날 어깨 아프다면서

무슨 일을 그렇게 많이 해요."

 

 

하루 일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 아버지는

밤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서로 발톱을 깎아 주고

서로 어깨를 주물러 줍니다

 

 

그 모습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나도 빨리 장가들고 싶습니다

 

 

 

어른이 되면

어머니 같은 여자 만나서

아버지처럼 살고 싶습니다

 

 

 

 

 

 

 

부부

문정희

 

 

부부란

무더운 여름밤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

어둠 속에서 앵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둘이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너무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 꽃만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어디 나머지를 바를 만한 곳이 없나 찾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어 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달에 너무 많이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문득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효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내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보는 그런 사이이다

 

부부란 서로를 묶는 것이 쇠사슬인지

거미줄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이다

 

 

 

이사

김나영

 

이 남자다 싶어서

나 이 남자 안에 깃들어 살

방 한 칸만 있으면 됐지 싶어서

당신 안에 아내 되어 살았는데

이십 년 전 나는

당신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나 당신 밖에 있네

옛 맹세는 헌 런닝구처럼 바래어져 가고

사랑도 맹세도 뱀허물처럼 쏙 빠져나간 자리

25평도 아니야

32평도 아니야

사네

못 사네

내 마음의 공허가

하루에도 수십 번 이삿짐을 쌌다 풀었다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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